[슙진] Wet on Dry (完)

다시 꺼내보는 가장 못난 나

안녕하세요 19년 8월부터 연재하기 시작했던 웻온드가 막을 내렸습니다. 연재주기가 벌어지면서 어떻게든 올해를 넘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해서 막판에 힘을 냈더랍니다. 그럼 후기 시작하겠습니다. 아래에는 상당수의 스포가 있으니, 완결까지 읽으신 후 제 후기를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Wet on Dry의 의미 1화 시작전에 타임라인에 써놨듯이 웻온드라이는 마른 종이...

살면서 죽음에 대해 막연히 상상해 본 적은 있었다. 그러나 한 번도 실제 죽음과 대면해보지 않았던 나는 그 형태를 체감해보지 못했었다. 감각도, 기본적인 욕구도 없는 절대적인 무(無)의 세계. 어둠의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짐작할 수 없듯 그 세계가 끝도 없이 펼쳐졌다. 나는 이제 슬픔과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하면서도 더 이상 형을 추억할 ...

일본에서 예정된 3년의 파견 생활을 채우지 못하고 돌아왔을 때 내 손에는 이민 가방 하나뿐이었다. 떠날 때보다 넘치지도, 부족하지 않고, 딱 가져간 만큼 그대로 들고 왔었다. 이번에도 나는 그때와 똑같은 무게감이 느껴지는 수트 케이스를 찾아 입국장을 나섰다. “오빠! 여기야!” 입국장 문밖에 낯익은 얼굴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동생 윤지다. “짐은 이...

우리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입을 맞췄다. 현관에 서서 으스러질 듯이 상대를 끌어안고, 이따금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처럼 서로의 손을 찾았다. 만져지지 않으면 상대가 곁에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숨 막힐 것 같은 키스. 나는 형의 입속을 맛보며 내가 끝없이 그 안으로 떨어지는 착각을 느꼈다. 그냥 ...

열여덟 살에 처음 본 너는 너무 어른이었어. 당연하지. 열다섯 살이나 차이가 났는 걸. 그 말을 하던 형은 찰나였지만 다시금 열여덟 살의 눈을 하고 있었다. 해본 적 없는 사랑에 첫 발자국을 디디려는 사람의 눈이었다. 형은 서른두 살의 나를 사랑했다. 소년인 민윤기를 사랑하면서 어른인 민윤기를 사랑하게 된 것은 기묘한 첫사랑이었다. 나의 우수는 이별에 ...

몸이 기억하는 연애란 간단하다. 0309. 현관 키패드 위에 내 생일을 기계적으로 눌러대는 손짓처럼. 아무런 고민도 없이, 후회도 없이 오랜 세월 동안 기억 속에 각인된 행동을 끄집어내면 그만이다. 당신한테 돌아가는 길, 당신과 함께 있을 때 하던 습관들 - 어떤 식으로 입을 맞추면 당신이 좋아하는지, 어딜 만져주면 좋을지 등등. 그러한 행동이 의식하기도 ...

커피 농축액을 물 위에 한 방울 똑 떨어뜨리면 농도가 높아 무거워진 갈색 용액이 유리 바닥에 가라앉았다. 물에 섞이길 거부하는 것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흡사 고집쟁이 같았다. 주변은 조금씩 경계를 잃어가는 주제에 말이다. 형은 인내심이 많았다. 결코 스푼으로 마구 휘저어 억지로 섞지 않고, 농축액이 따뜻한 물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때까지...

나는 형이 내려주는 커피를 좋아했다. 시간을 들여 거름종이를 통해 한 방울, 두 방울씩 신중히 내린 커피는 화려한 향은 없었지만, 묵직한 맛을 지녔다. 커피를 목 뒤로 넘겨도 쌉싸름한 맛이 혀끝에 오래도록 감돌아서 반드시 다음 모금을 찾게 했다. 마치 형처럼. 형이 정밀한 실험을 하는 연구자처럼 드리퍼에 천천히 물을 붓는 동안 나는 물끄러미 형이 하는 모양...

일본에서는 회사와 약속한 3년을 채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만나지도 못하는 엄마가 아프다는 핑계로 나는 회사에 생떼를 쓰다시피 했다. 후임을 구하느라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나의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나는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공항에 내려 한국 땅을 밟은 순간 나는 얼떨떨하기까지 했다. 돌아오는 게 이렇게 쉬운 줄 알았다면, 왜 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형은 나에게 헤어지려는 이유를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오랜 관계를 정리하는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거늘. 그 원인을 애써 따지려거나, 관계가 소원해진 탓을 나에게 돌리지도 않았다. ‘윤기야, 우리 헤어질까?’ 묵묵히 다가온 이별의 손을 잡았을 뿐. 나는 형이 나처럼 지친 것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원래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언제나 형과의 첫 번째 이별을 생각하면 작별을 고하기 전의 길었던 침묵이 생각난다. 수화기 너머 들리는 형의 한숨 소리, 그 뒤로 조용하게 깔리는 전파음. 우리는 헤어짐이 문턱에 와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누가 먼저 그것을 인정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겁 같은 침묵의 시간에 나는 질식할 것 같다고 느끼며, 전화기를 부서질 듯이...